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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성공회 이야기 / 관상기도 / 영성생활

Clearness Committee in detail

 

 

 

현실과 진실 사이의 큰 간극 사이에서 수동적이 아닌, 공동선을 향해 실제로 작용하는 무엇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삶의 보다 깊은 자원에서 진정한 용기를 끌어내는 것,  우리 안에는 용기가 있으며 진정한 용기에로의 소명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그 어려운 작업을 지지하고 그 일에 자양분을 공급할 길로서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나는 명료화모임을 제안합니다.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로 지켜주며 돕는 한 가지 길—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강력한 도움이 되었던 하나의 길입니다.

 

 

 

명료화모임의 틀과 진행순서

(Parker describes a schedule indicating the general time frame and sequences of the Clearness Committee process)

명료화모임의 내용을 깊게 다루기 전에 먼저 그 진행과정과 전체 틀이 어떤 것인지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9:45.

명료화모임에 참여한 우리는 침묵 가운데 기다립니다. 중심인물이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진술을 시작합니다.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중심인물을 위하여 중심 잡힌, 조용한 침묵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 두 시간 동안 서로 잡담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되며, 사회생활에서 흔히 소통하는 방식을 멈추고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대할 것입니다.

 

9:45~10:00.

중심인물이 자신이 명료화모임에 내놓으려고 한 진술을 하는 시간. 중간에 방해받지 않도록 합니다. 15분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으나, 우리가 할 일은 주의를 기울여  그저 듣는 것입니다.

 

10:00~11:30.

중심인물의 진술이 끝나고 그가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대화를 제외한, 정직하고 열린 질문만을 합니다. 이때 우리의, 말로 표현되는 행동과 말로 표현되지 않는 행동 모두 중요합니다.

 

 

 

정직하고 열린 질문

(Honest open questions)

오로지 정직하고 열린 질문만을 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열린 질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가장 근접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가장 옳고 훌륭한 답을 알고 있고, 당신이 그걸 말해주길 바래” 하는 생각을 하며 묻는 것은 결코 정직하고 열린 질문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고 열린 질문은, 당신이 그 질문을 하면서도 소위 “옳은 답”이 무엇인지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방금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할 때, 그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이와 같은 것이 정직하고 열린 질문의 좋은 예입니다. 중심인물이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인물이 화가 났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여러분이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화가 났을거야.” 라고 추측하며, “그래서 화가 나지 않았나요?”라고 묻는 질문은 정직하고 열린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미묘한 수준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지키기는 쉽지 않지요. “나라면 화가 났을테니, 당신도 화가 났을거야”라고 생각하며 묻는 것은, 중심인물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잘못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용서하고 다시 원칙을 기억합니다—중심인물이 정직하고 열린 질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답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또한, 어떤 질문에 대해 중심인물이 탐구하고 싶지 않은 영역일 경우이면, 답하지 않을 자유가 중심인물에게 있는 것입니다. 중심인물 외의 다른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 할 자유가 없습니다. 나는 이러해서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말하거나, 침해를 해서 미안하다거나 할 자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중심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에게 무엇이든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권위를 주는 것—그것이 중심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명료화모임에서 갖게 되는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적절한 질문의 속도

(Pacing of the questions)

질문의 속도 또한 중요합니다. 명료화모임에서의 질문은 반대심문이나, 대질심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질문과 답, 다시 질문을 하는 사이에 공간을 두십시오. 질문의 속도가 자신에게 빠르다면 중심인물은 속도를 늦추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질문할 때 앞의 질문과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한 사람이 질문을 이어서 세 번 이상 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중심인물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서 그 공간이 열린 공간이 되도록 하십시오.  

 

 

 

거울비춰주기

(Mirroring)

명료화모임에서 Mirroring은 매우 귀중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명료화모임이 시작되고 사분의 삼, 또는 한 시간 반의 시간이 지나 질문과 답이 끝나고 중심인물이 이런 시간을 갖기 원하면 Mirroring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Mirroring은 또한, 명료화모임의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중심인물에게 충고나 교정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Mirroring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중심인물에게 초점을 맞추며 봉사하는 것, 문자 그대로 (중심인물이 한 진술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Mirroring의 좋은 예를 들자면, “당신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와 같은 것이지요. 그것이 다 입니다. 더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더 이상 다른 어떤 내용을 말하면 안 됩니다. 중심인물의 말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등등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거울을 들고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Mirroring의 예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중심인물의 세 가지 답을 이어서 비추어줄 때 그것만 비추어주지, 그것들을 연결해서 당신의 논리를 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계속 명심해야 할 원칙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석하고 평가하며 틀을 만들려는 당신의 욕구는 뒤로 물러서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중심인물의 내면의 교사—그의 내적인 지혜를 신뢰하며 물러나있는 것입니다.

 

몸짓을 통한 Mirroring 역시 중요합니다. 이것은 좀 더 미묘하고 속기 쉬운 것입니다. 말로 하는 Mirroring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걸 제대로 하려면 현상학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제대로 된 Mirroring을 할 때의 자세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고 시선은 아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직업 중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중심인물의 진술을 Mirroring할 경우,) 직업A에 대한 그의 진술을 Mirroring할 때는 중심인물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처럼 말했던 걸 반영하여 읽다가, 직업B에 대한 중심인물의 진술을 Mirroring할 때는 열성적인 감정으로 그의 진술을 읽는다면, 그것은 곧 중심인물에게 “직업B가 옳은 선택인 것 같지 않아? 당장 그걸 선택하는 게 어때?”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웃음).  왜냐하면, 중심인물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안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내면을 해석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중심인물의 영혼, 그의 내면을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심인물이 Mirroring을 초대할 때 이런 원칙들을 지키며 Mirroring을 하게 되면 엄청나게 귀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Mirroring의 15분 시간은, 명료화모임이 중심인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지혜를 다시 모아들이는 것을 돕는 시간, 모임이 해산하기 전 자신의 진술을 다시 한 번 듣게 되는 기회일 뿐입니다.  

 

 

 

긍정과 축하

(Affirmations & Celebrations)

명료화모임을 끝내기 5분 전 쯤에는 중심인물이 용기를 내어 진행한 2시간의 모임을 긍정하고 축하해주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수십 차례, 백여 차례의 명료화모임을 한 경험으로부터 말하자면, 이 ‘긍정과 축하의 시간’이 단 한번이라도 부정적인 경험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항상 진정성 있고 깊이 공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명료화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항상 한 사람의 영혼을 만나게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시간 이 지났을 때 당신은 한 영혼이 그의 삶의 한 부분을 당신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중심인물의 영혼을 지켜주는 이중보호원칙

(Double Confidentiality)

그래서 그의 영혼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명료화모임이 끝나면 어떤 다른 영혼에게도 중심인물이 한 말을 반복하지 않음으로 그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 첫째 원칙입니다. 이 명료화모임에 함께 했던 영혼들과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명료화모임은 끝났지만, 중심인물의 영혼을 보호하는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모임이 끝나고 하루나 일주일, 또는 몇 달 뒤에라도 중심인물을 만났을 때 “그때 명료화모임에서 당신이 이렇게 말했던 것에 대해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고 말할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명료화모임에서 우리는 신성한 공간을 보호하되, 영원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보호의 원칙을 지킴으로 해서 비로소, 중심인물은 모임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영혼이 침해됨을 염려하지 않고) 계속하여 자신의 내면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인물은 우리에게 다가와 명료화모임의 이슈에 대해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원하기 전에는,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해 꺼내어 말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공간을 보호하기

(Holding a space)

명료화모임의 참여자로서 여러분의 임무는, 2시간 동안 중심인물 한 영혼이 존재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 공간에서 물러나있게 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말뿐 아니라 여러분의 에너지까지 중심인물 한 영혼을 위한 공간을 2시간 동안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나는 이 공간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명료화모임에서는, 뒤로 물러나 호흡을 천천히 하며 나의 의도를 들이밀지 않고 단순히 중심인물 한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을 홀딩하는 것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예를 들자면, 명료화모임의 참여자들은 중심인물이 감정적으로 동요되었을 때에도 그를 위로하려거나 할 자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에게 크리넥스를 주거나 그의 팔위에 손을 올려놓거나 하는 것은 중심인물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나의 내면의 교사와 나 사이의 대화를 침범하여 그 대화를 사회의 관습적 대화로 변질시키는 것이 되거든요. 다른 사람의 위로의 행위가 개입되는 순간 중심인물은 자신의 내면의 교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정확히 이런 것이, 명료화모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건 내 아버지가 아끼시는 구식승용차가 아니거든요(웃음). 내가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 누군가가 “이 눈물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라는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할 수는 있겠지요. 내 눈물에 당황해서 위로하거나 울지 않게 하려는 시도는 중심인물인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명료화모임에서는 항상 뒤로 물러서 공간을 보호하되 순간순간 충실하게 중심인물에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 참여자인 당신의 의도는 중심인물인 나의 내면의 대화를 지지하며 조용히 깨어있는 것,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중심인물인 내가 때로 농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이 조용히 미소를 지을 수는 있으나, 큰 웃음으로 끼어들어 나의 공간을 침해할 자유는 없습니다. 중심인물인 내가 농담을 하면 아마도 중심인물인 나 혼자 웃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인물이 아닌 사람이 함께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중심인물이 농담으로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게 될 때, 그것을 직면하는 고통 때문에 농담으로 빠져들 때에—나 자신도 그래봐서 압니다— 여러분이 함께 웃어버리면 사회의 관습적 맥락이 되어버리고, 그 결과 여러분은 내가 나의 내면의 교사와 대화할 기회를 놓치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단순한 초점, 단순한 의도로 이 공간을 지키는 것입니다—중심인물의 내면의 교사만이 중요하다는 단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옆으로 앉아 손을 한쪽 턱에 받힌 자세) 이런 자세로 있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도 아니겠지요. 중심인물의 공간을 침범해서도 안 되고, 동시에 그 공간을 회피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Neither In-vading, Nor E-vading'). 여러분의 유일한 의도는 내가 나의 내면의 교사와 대화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깨어서 지켜주는 것입니다.

 

 

 

비언어적 신호의 중요성

(Non-verbal signals)

지금까지 여러분은 15분 정도 내 말을 들으며 함께 하면서, 내 말이 이해가 되었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궁금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말이 아닌 신호들을 통해 여러분은 내 말이 충분했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면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이 아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서로의 소통에 도움이 되나, 명료화모임에서 이런 신호를 보내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해서 다시 관습적인 소통의 습관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지요. 관습적인 맥락으로 돌아가는 순간, 중심인물인 나는 내가 제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고 있음을 여러분에게 설득하려는 관습적인 소통의 습관이 살아납니다. 듣는 여러분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지거든요. 그럴 때 내가 그런 자세를 깨는 것은 어려워요. 나에 대해 공감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 해서 여러분은 중심인물인 내가 가장 안 좋은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합니다.

 

중심인물들에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중심인물은 눈을 감을 수도 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질문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면, 시선을 내리고 중심의 초를 바라보고 있어도 됩니다. 또는 천장이나 창문 밖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명료화모임의 참여자들은 중심인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중심인물은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과는 가능한 한 관여하지 않는 자세를 갖는 것이 자신의 내면의 교사와 대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반문화적입니다. 이런 문화는 보통의 경우라면 무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명료화모임의 상황에서는 이것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식이지요. 정확한 예로 저의 경험을 들어보겠습니다. 몇 년 전 중심인물로서 저에게 주어진 권위에 대한 것인데, 내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나의 명료화모임 멤버들이 나에게 진리에 다가갈 권위를 주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눈을 감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다면, 다른 누구를, 또는 어떤 무엇에 대해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동의나 반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거기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듣는 사람은 나 자신이야, 그런데 나는 왜 이걸 하고 싶어하는 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료화모임에 대한 두 가지 비유

(Two final images)

명료화모임에서 중심인물의 영혼을 홀딩하며 돕는 데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죽어가는 이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이미지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명료화모임에 대한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면서 두 가지를 배웠고, 앞으로도 그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 하나는, 죽어가는 이의 옆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문제를 고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어가는 사람을 고치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깨어 그저 지켜보는’(bare witness, fully present)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공감의 마음으로, 조용히 그의 영혼을 받치는 마음으로 그저 그의 옆에 있는 것. 이 상황에 나는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배운 다른 하나는, 동시에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이어서 보고 있기가 힘들어 원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을 거기 두고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의를 거기 두고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은 그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죽어가는 이의 옆에서 그의 영혼을 침범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 것, 그런 것이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명료화모임에 도움이 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미지는, 열린 두 손 안에 작은 새 한 마리를 홀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지요. 이 열린 두 시간 동안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유혹이 다가옵니다. 처음 십오 내지 이삼십 분 동안 일어나는 유혹은, 그 새를 받치고 있던 손을 조여 새를 잡고서 털을 뽑아내고 해부하려는 충동입니다. 이 중심인물을 분석하면서,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저 사람은 내가 보는 것을 못 보는 것일까?” 하면서 내 방식대로 그 사람을 보려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That‘s the way mind works.) 우리는 그러한 유혹에 저항할 것입니다—우리의 손을 열어두는 단순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이나 입으로 그의 영혼을 분석하고 재단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로 오는 유혹은 1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데, 재단하고 분석하는 것을 삼가면 한 영혼의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새를 받치고 있던 손이 힘들어지고 내려놓고 싶어지는 거지요. 주의를 기울이던 것이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그 영혼을 홀딩하려는 의도가 사라집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작은 새는 아주 가볍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더 가볍겠지요. 우리는 두 시간 동안 그 새를 손에 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로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뿐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유혹은, “날아봐, 날아봐, 네 문제를 해결해”하면서 새를 날려 보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새는 자신이 원할 때에,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명료화모임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잘 했다는 증거는, 새가 날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 시간 동안 그의 영혼을 잘 홀딩했다면 그에게 그 공간은 이후 아주 긴 시간, 그에게 기억되는 중요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공간을 홀딩하는 것에 충실할 수 있다면, 중심인물이 자신의 내면의 교사와 소중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명료화모임_(DVD)[1].hwp

Posted by 천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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